첼시 클린턴의 그림책 <She Persisted> 리뷰: 여자아이들의 꿈을 돌려주세요
![]() | She Persisted: 13 American Women Who Changed the World (Hardcover) - ![]() Anonymous/Philomel Books |
첼시 클린턴의 그림책 <She Persisted>를 손꼽아 기다렸다.
요즘 어린이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초등학생일 때 몇몇 남자아이들의 장래희망은 대통령이었고, 몇몇 여자아이들의 장래희망은 영부인이었다.
사실 어린아이가 구체적으로 정치에 뜻이 있거나 대통령이 뭐하는 사람인지 알고 하는 말은 아닐테고 그저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표현을 한 건데 여자아이에게는 대통령을 꿈꾸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것이다.
또, 여자아이에게는 가장 존경하는 위인을 적어내라는 과제도 곤혹스러웠다.
아이에게 존경하는 위인이라는 건 닮고싶은 롤모델을 묻는 건데, 아이는 성별 정체성과 업적을 쉽게 분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애초에 성별이 다른 사람을 닮고 싶어하는 건 아이에게 어려운 일이다. 그럼 위인전집에 들어있는 여성이라고 해봐야 마리 퀴리, 나이팅게일, 유관순, 신사임당 정도에서 골라야 하는데 다양하고 대단번쩍한 남성 위인들에 비해 참 좁은 선택지 아닌가.
그분들의 업적 자체도 상당히 의도적으로 폄훼되어 있는 면이 있고.
이 부분도 가볍게 언급하자면, 당당하고 위대한 과학자인 마리 퀴리는 퀴리'부인'으로, 위생의 개념을 처음 도입해 전쟁중 부상병의 생존률을 비약적으로 높이고 전문직으로서 간호사의 지위를 처음 정립한 나이팅게일은 고작 '백의의 천사'로, 독립투사 유관순 열사는 '누나'로, 훌륭한 예술가인 사임 신인선은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호인 '사임'에 '집구석에 쳐박혀있는 여자'라는 의미를 강조한 '당'까지 붙여 '신사임당'으로, 그마저도 예술가보다는 현모양처(ㅋㅋㅋ)로 알려져 있으니 이들에게 존경심이 생기겠는가.
이런 마당에 한창 꿈많은 아이들에게 부인, 천사, 누나, 현모양처 중에 뭐가 되고 싶니? 라고 묻는 꼴이니 여자라는 이유로 꿈꾸는 것조차 비참할 정도로 억압받는 현실이다.
<She Persisted>는 '세계를 바꾼 13명의 미국 여성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만큼, 미국의 여성들만을 소개한 책이다. 그러다보니 비교적 인지도 있는 인물은 헬렌 켈러나 오프라 윈프리 정도고, 더 역사가 오래된 유럽이나 아시아의 인물들은 없다. 그리고 그림책이기 때문에 분량의 한계도 있고 각 분야의 구색을 맞추려고 했는지 좀 기대했던 인물들이 빠져있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 추려진 13명 중에도 꽤 많은 인물이 생소한데, 그들의 업적을 그대로 남자가 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우린 그 인물을 모를 리가 없다. 그보다 덜 위대한 일을 한 남자들은 잘도 엄청나게 영웅시되고 알려져 있으니까. 우리가 이 여자들을 알아야 하는 이유다.
그림책의 형태로는 어떤지 몰라도 미국에는 이런 식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여성 위인들의 업적을 모아 소개하는 책들이 이미 몇권 나와있다. 국내에는 <Girls Think of Everything>이 <여자들은 똑똑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고(국내제목 극혐-_-;;), 아마 이게 전부인 듯.
+추가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절판됐지만 도서관에서 볼 수 있음
![]() | 여자들은 똑똑해 - ![]() 캐서린 티메시 지음, 최지현 옮김, 멀리사 스위트 그림/보물창고 |
<She Persisted>는 그림책의 형태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그리고 유명인사인 힐러리 클린턴의 딸 첼시 클린턴의 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 때문에 국내에도 번역되지 않을까 상당히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을 포함한 세계의 많은 여자아이들이 이런 종류의 책을 접해서, 극도로 억압받는 환경에서도 지지않고 끈질기게 싸워 과학자, 혁명가, 의사, 판사, 예술가 등이 되어 위대한 일을 해낸 여자들을 만나길 바란다. 그리고 부인, 천사, 누나, 현모양처를 꿈꾸는 대신, 누구에게도 대상화되지 않은 온전한 자기 자신을 선명하게 꿈꿀 수 있길 바란다.